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굉장히 성경에 누구나 다 아는 본문인데, 주일 예배에 한 번도 안한 것 같아서 다루려 합니다. 오늘 돌탕집탕 하니까 돌탕이 삼계탕인가 오골계 탕인가. 오늘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돌아온 탕자 얘길 하려 합니다. 지난 주 복이있도다의 설교는 이제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교회로 나라로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포도나무처럼 아무리 잘 밟히고자 해도 오늘 본문은 한 영혼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 만으로는 참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내 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가난한 자들 몸 아픈 자들 다리 저는 자는 청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갚을 것이 없는 사람 어떻게 청하고 싶겠습니까? 15장 앞장에 14장에 봐도 청하는 1차 대상이 소 사고 밭 사고 장가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먼저 청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말씀의 잔치를 배풀고 청해도 그들과 비슷한 유대인 서기관 바리새인은 한결같이 사양하며 이유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양하니 갑작스레 가서 이제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은 청하자마자 달려옵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지만 조금만 먹을 것이 있으면 한결 같이 사양을 하기 때문에 환경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하시고 부르십니다. 강권해서라도 채우라 하셨으니 강권해야 할 사람도 있지만 한결같이 사양하는 사람들에게서 지금은 떠야 될 시간이에요. 이걸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회개도 중요하지만은 누가 초청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인인가 그 시각으로 이 탕자의 비유를 보려 합니다. 주님은 백 마리 양 중에서 건강한 99마리 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하게 보시고 열 드라크마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에 관심 있으시고 이젠 범위 좁혀 두 아들 중 탕자인 아들을 찾습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집에 있는 탕자의 본문 통해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마음 알기 원합니다.
1. 돌아온 탕자입니다.
11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집안에서의 삶보다 다른 곳에 가면 큰 만족이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틈만 나면 계획 세워 아버지 떠나 내 뜻을 마음껏 펼치는 것이 소원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만 보면 짜증이나고 숨이 막혔을 것이고 아버지의 걱정어린 말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어서 빨리 죽어야 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당시 상속 절차에 의하면 큰아들은 2/3를 받고 둘쨰 아들은 1/3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받으면 다시 그것의 1/3만 받게 돼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물려주었다고 해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에 대한 소유권만 가질 뿐 처분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의 총 1/9밖에 못 받는데도 죽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유산 달라 땡깡을 부린 것입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제대로 된 유산이 아니어도 된다 내놓으라 당연하듯 요구합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 요구하는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지극히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철저히 짓밟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이런 놈은 단지 한 집안의 문제 아닌 마을 어른들이 함께 치리해야 할 공동체의 문제로서 이런 자식은 마을 사람이 뺨을 친다든지 가족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한다든지 더 극단적인 경우, 아들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장례식을 치룰 수도 있엇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줍니다. 수치 남겨준 아들에 대한 응징 아닌 본인이 그 수치 안고 아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합니다. 재물을 다 모아서 갔다는 것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어요.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꿔 갔으니 땅도 다 팔아 간 거예요. 고향 땅이고 뭐고 다 싫은거예요. 찾지 못할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무슨 상처가 있었는지 할 수만 있으면 가족의 연을 다 끊어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자기 부르심으로 떠났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그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허랑방탕으로 줄달음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물의 성경적 가치관이 없었기에 며칠이 못 되어 다 없앱니다. 몇 대가 부자여도 돈 들어먹는건 순식간입니다. 열등감많은 사람은 돈 밖에 자기 치장할 것이 없기 때문에 돈만 요구하고 돈으로 해결하고 돈으로 자랑합니다. 그렇게 무리하게 재물을 요구했던 탕자의 마음 속엔 근본적으로 열등감의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허랑방탕하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돈 때문에 좀 풀리는듯했지만 잠시후에 재물과사람모두에게 배반을당합니다. 아들의잘못된 동기를잘알면서도 허락한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싶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처럼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어요. 이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의 과정을 겪어야 되는 거예요. 겪어야 함을 아는 것이에요. 그러니 사랑은 재물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질문
어떤 부분에서 신앙도 가족도 다 끊고 내 뜻대로 하고싶은 강한 욕망이 있습니까?
그 욕심 때문에 허랑방탕으로 갈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습니까?
그사연이누구의 잘못도 아닌 무분별한 내삶의 결론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14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아들도 아버지 입장에서도 다 없앤 후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드는 것은 징벌입니다.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고자 간 그곳에 흉년이 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허랑방탕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나라님도 막을 수 없는 흉년인 것입니다. 우리집에 징벌이 온 것, 흉년이 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궁핍하기를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궁핍이 인생의 약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는 인생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그 나라까지 흉년이 들 수 있습니다.
15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되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하지만 비로소 궁핍한 것 가지고는 낮아지지 않았어요. 돼지 치는 것까지 갔어요 그것도 안됐어요.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어요. 그것도 아직 안낮아졌어요. 쥐엄열매도 없어서 못먹게 되는 데까지 가게 돼야 돼요. 여기까지 가야돼요. 비로소 궁핍에 돼지 열매에 쥐엄 열매에 그것도 없는 것. 여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식 도와주는 게 뭔지 모릅니다. 돈으로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부도났을 때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면 사람이됩니다.
이번 주일에도 정말 죽겠다고 오신 분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감옥 가시라고 그랬어요. 감옥 가시면 된다고. 우리들교회 감옥 가신 분 많다고. 오늘 꼭 오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오셨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연민으로 자꾸 도와주면 한 사람 망할 것 열 사람 스무 사람 백 사람이 망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야 올라올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재산이 허비돼서 구원이 된다면 그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너무 돈을 좋아하고 쉽게 써버리니까 그 아버지가 절대로 저 아들에게 돈을 줘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급해진 아들이 전보를 쳤어요. 당신의 아들이 굶음.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답장을 하기를 굶어죽어라. -애비-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습니다. 20여년동안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연을 끊고 지내다가 어느날 성공을 했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꺠닫고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1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편지를 남겼어요. 아들아 내가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네가 정신 차리고 잘 살기를 바라서 그런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안 찾아오는 것을 보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도리어 다행이다. 하루도 너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가난하기를 청한자 외에는 모두가 가난을 수치로 여깁니다. 가난을 수치로 여기니까 큐티 하면서도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없이 살면서도 기쁘다고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수치로 여기는 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입니다. 가난한 것이 수치스럽고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든다면 징벌입니다. 징벌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고향에 있으면 금세 손을 벌렸을테니까 먼 나라에 가서 허비한 것이 잘 된 일입니다. 스스로 돌이킬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로소 궁핍한 단계, 돼지치는 단계, 돼지치는 쥐엄열매 먹는 단계, 쥐엄 열매도 없어 못먹는 단계중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낮아 지셨습니까?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너무도 치사하지만 배가 고픈 거예요. 이제 내가 밥 먹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래도 이제 원망도 욕심 허풍도 다 없어지고 자기 아버지집의 품꾼이 굶지 않는게 너무 부러운거예요. 여기까지 가야돼요. 큰아들하고는 감히 이제 비교도 안합니다. 이렇게 내려가서야 자기 주제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저 굶지 않는 것을 부러워 할 정도의 치사함과 배고픔을 겪어 보셨습니까? 요즘 누가 부럽습니까? 잘 사는 친척, 동창이 부럽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인생을 생각할 때 감히 지금 누구를 부러워 하겠습니까? 내가 내 주제를 아는 것부터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떡을 갇다 줘서 회개하는 게 아니라, 고난이 있으니까, 먹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 유명한 100프로 죄인이 저절로 꺠달아 졌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가 그래서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니에요. 마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랬어요. 가난하니까 자기 죄를 보게 됐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만 합니다. 그 사람이 날 꼬여서 망햇어 투자하라 해서 했더니 망했어 이민 오라 해서 날 속였어 갔더니 망했어 돼지 주인이 쥐엄열매 준다 하고 사기쳤어. 흐흐. 이러면서 원망을 합니다. 죄의 특징이 원망입니다. 하지만 우린 망하고 쫓겨나는 힘든 사건 속에서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나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며 또는 스스로 책망하며 회개 아닌 후회 원망만 품고 있진 않습니까?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기 죄를 보게 된 둘째 아들은 자기 주제를 알게 되니 아들로 불려질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통감합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아버지께 당당하게 가서 내 몫을 내놔요 했던 둘째 아들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품꾼의 하나라도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참 회개의 모습이 이런 겸손함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그 꺠달음이 우리를 성숙케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감정이 회개의 감정입니다. 가장 멋있는 감정도 회개의 감정입니다. 우리가 립서비스로 사랑한다 백 번 보다도 내가 죄인이다 고백보다 감동을 주는 언어는 없습니다. 그 언어가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나땜에 힘들었던 사람들까지 사는 길은 내가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죄를 미워하면서 청산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 마음 먹었으면 행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주님은 벌써 아시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와 안아주십니다. 측은히 여겨는 우리 말에 애간장이 녹는다 이런 표현이에요 . 창자가 상할 정도로 애틋한 마음을 뜻하는 단어예요. 여러분 여기서 누가 가장 아팠을까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더 아픈 사람이 없어요. 아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 아버지는 늘 동구밭 나가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에요. 사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집안에 들이지 아니하고 죄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네가 변했는지 봐야겠다고 공개적 창피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직 거리가 먼데도 저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봤다면 분명 그 시간이 밤이 아닌 낮이었을 거예요. 그 시간이라면 마을에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아들을 알아보는 사람에 의해 어떤 수치를 당할 지도 모르는 거예요. 혹시라도 그럴까봐 아들이 돌아온 걸 보자마자 아버지는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거예요.
달려가다로 번역된 헬라어 "트레코"는 경기장에서 육상 선수가 전력질주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예요.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달음질한. 그냥 간 게 아니야. 쏜 살 같이 달려갔어요. 나이도 많은 사람이 체통이고 뭐고 없이. 명예와 체통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이고 수치스럽기 까지 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명예와 체면 자존심을 모두 버렸고 아버지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까지 포기했습니다. 자식이 어떤 멸시와 위해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아들의 수치를 자발적으로 떠안았습니다. 아버지의 자발적 수치가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준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오늘 잘 들으셔야 해요. 탕자가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준 게 아냐.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는 분이 아버지에요. 아들이 변해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고통이며 기다림인 것입니다. 집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방해물이었을 뿐, 아들은 마치 고아처럼 살았어요. 그러나 낮아진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떄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잃어버린 아버지를 돌아주기 위해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아들을 떠나보냈고 재물을 허비했습니다.
21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 하더라.
둘쨰 아들은 마음 속으로 회개한 것을 아버지에게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회개는 이렇게 언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들 말로 해야 아냐? 그렇습니다. 말로 해야 압니다. 사랑이 차 있으면 말로 안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절대로 안하는 사람은 아직 회개가 안된 것입니다. 회개는 옆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칩니다. 나 혼자 회개는 없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이제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 중 하나가 될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서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자기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에서 비롯한 아버지의 용서로 그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온 탕자였어도, 고용된 품꾼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짓거나 안짓거나 영원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낌없이 기쁘게 재물을 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을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먼저 제일 좋은 옷을 입혀서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어요. 정말 의의 옷을 입혀주셨어요. 주인으로서 갖는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 가락지를 손에 끼우고 종이 아닌 집 주인으로서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신을 신겨줍니다. 특별한 날 내어주었던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그만큼 특별한 아이란다. 너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는 아이란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낭비처럼 까지 보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을 떄 나를 안아주는 하나님의 사랑 가족과 지체의 사랑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미처 고백하지 못하고 회개하는 마음만 먹어도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진정한 그 회개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온 탕자처럼 귀하게 여기신 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들은 돌아갈 곳을 생각하면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현재 아버지 품 속에 안겨있습니까? 예. 오늘 절마다 다 적용을 해야할 것인데 여러분들이 너무 힘들까봐 그냥 알아서 적용을 이렇게 골라내시기 바라요. 그런데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으니 맏아들이었습니다.
2. 집에 있는 탕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집에 있는 탕자가 참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다 초점을 더 맞춰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25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떄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둘째 아들 표현 ->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은데 동생보다 많이 받은 맏아들이 품꾼들과 같이 밭에 나가 일했다니 너무 성실 근면한 사람 같아요 스스로 열심히 하니 열심히 살지 않고 노력 않는 사람을 이해 어려운 성격이었을 것. 아버지께로 받은 유산도 많으니 아쉬운 소리 들을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손가락 질 받을 일도 없는 사람. 그런 맏아들이 그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 일까지 하니 이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일터의 현장인 밭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길을 울리는 풍류와 춤추는 소리에 맏아들은 의아.
26절.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습니다. 뒤에 나오면 뒤에 나오는 거 보지만 이 맏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종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버지에게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묻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은 것도 이 시제로 미완료 시제라고 이해가 안되는데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에요. 성실한 사람이 우리 교회에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13년을 온 똑똑한 분이 지속적으로 이해 안돼서 지금도 목장x 그 분이 s대 출신. 지속적으로 제 설교가 이해가 안돼요. 지속적으로. 왜냐면 이 모든 사람들의 간증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탕자의 간증이 나하고 상관이 없어. 저거는 저 찌질한 인간들이나 저러는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 된 게 나하고 뭔 상관이야 이게 맏아들.
27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도리어 종이 아버지 마음 더 잘 앎. 맏아들은 종보다도 아버지 마음 더 못 알고 있습니다. 남보다 못한 가족입니다. 부모님의 배우자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가 어떤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걸 꼭 말해야 아느냐 하며 외면하진 않았슨비까? 그러며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며 고독해하진 않습니까?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함께 즐거워 할 것을 당연히 기대했는데 맏아들은 분노로 반응합니다. 아버지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벌하지 않은 것에 분개. 그가 환대 받고 그의 행동이 너그럽게 용서 받았기에 더욱 화를 냅니다. 요즘 분조장 목장마다 계시던데 노가 쌓여 있으면 혈기가 충동적으로 나와 가족 관계 비뚤어지게 합니다. 한 사람의 분노가 그렇게 심각합니다. 맏아들 둘째아들 탕자와 모범생이 예수 없음 다 똑같이 문젭니다. 우리는 차별 없이 권해야 합니다.
적용질문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오해하고 분노 분개 하는 배우자 자녀 있습니까?
혈기 아닌 끊임없이 인내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29절.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기서 아버지를 섬기다는요 원어는 "둘료"라고 자식으로서가 아닌 종으로 섬겼단 표현예요. 자신과 아버지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인식하고 살아왔음 드러냅니다. 그렇게 그런식으로 여러 해 섬기고는 겨우 바라는 게 염소새끼 한 마리를 바랐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거기는 충성한다고 반응한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구 그러는데 저는 충성하겠습니다. 모독입니다. 앞 부분 원어로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다음에 아버지를 룩 이거는 아버지를 이봐요 이런 거예요.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아버질 사람같이 여기지도 않아요. 여러분이 나이들어 부모님께 이봐요 야 이런 분 있다면 빨리 호칭부터 바꾸시길.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고 해도 호칭부터. 둘째 아들이 1/9 가지고 나갓으니 8/9이 자기것 될거라고 회심 미소, 공상 하며 충성에 열을 냇어요. 근데 둘쨰 아들 돌아오니 충만햇던 기쁨 사라짐. 자기 몫 사라짐. 아버지 아닌 돈 존경하고 눈치 본 것. 아버지에게 잘 보여야 해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에 함께 즐길 줄도 모르는 절벽같은 매력 없는 사람입니다.
정리하자면 맏아들은 열심으로 종과 같이 아버지 섬김으로 아버지 호의 살 수 있고 자식의 신분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형제 누구 땜누에 내가 손해 봤다고, 내가 부모 땜에 하고 싶은 것 못했다고 분해 하는 것이 맏아들과 마찬가지. 내가 정말 사랑해서 햇다는 것 자체가 복. 사랑 없이 수고, 칭찬과 물질에 보답을 바라는 것은 제일 하위 개념. 가장 하위 개념. 생색 내시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보다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보셔야 합니다.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에게 대들었어요.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안합니다. 오히려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ㄴ 저 ㄴ 보다 훨씬 더 나쁜 욕입니다. 맏아들은 방탕했던 동생 정죄, 무시하고 감싸주기 보다 관계 끊고 싶은 것으로 보입니다. 맏아들이라고 그런 맘 없었겠습니까? 방탕하게 놀. 그에게는 둘째 아들에게 없는 근면성실 있었습니다. 자기 수양과 영성 있어보이지만 실상은 의로운 교만으로. 서운함과 분노 가운데 아버지는 없고 오직 자신을 몰라주는 불공평한 늙은이만 있었습니다. 회개 전에 둘째 아들도 그랬잖아요. 아버지는 죽었음 좋겠다. 이 아버지는 너무 믿음 있지만 둘째 첫째 아들이 전부다 불효잡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얼마나 외롭. 이 맏아들은 피해 의식으로 스스로를 상처주며 나 홀로 외로워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 속에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과 동생을 비교합니다. 둘쨰 아들은 또 맏아들 비교하고 나가고 이 맏아들은 뭔가가 둘째 아들한테 자기한테 없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착한 아이 증후군에 관한 글 하나 읽었습니다. 자존감 낮은 착한 아이 증후군 가진 아이 중에. 어려서 부터 자기 주장 없어 다루기 편하니 착한 아이라 하는 것 뿐예요. 성도 자녀와 목회자 자녀가 싸우면 무조건 목회자는 자기 자녀에게 사과하라 합니다. 이때 아무런 저항 반발 없이 사과하는 아이를 착한 아이라 부릅니다. 넌 목사 아들이니깐 무조건 사과해야돼. 저도 그러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우리 아버지가 목사니까 나는 사과해야돼 쌓이니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서 목자 자녀들이 정말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진짜 아닌 가짜, 원본 아닌 복사본으로 삽니다. 자기 없는 삶이 구체적 증상 다음과 같아요. 남의 눈치만 살피고 싫어 못하고 참고 또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스스로 결정 못내리고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피해 의식에 젖어있어. 섬김 받았기에 유악 무익 늘 우울. 여러분은 착한아이 컴플렉습니까? 진짜 착한 사람입니까? 정말 이걸 보니까 저는 돌탕 아닌 집탕이더라구요. 정말 99프로도 아니고 집탕이더라구요. 정말 내가 이제. 나를 살아내기 위해서 착실하게 살은 게 아닌가. 여러분들께 분노했다는 얘기가요. 돌아온 탕자 얘긴 그런 얘기 없어. 집안의 탕자, 똑똑한 맏아들에겐 분노가 있어. 더 나쁩니다. 어쩌면 큰아들 때문에 작은 아들은 떠나 보냈을 수도 있슴다. 맏아들은 너무나 회개 모르죠. 자기가 보기에 별 잘못 x 방탕하고 무책임한 동생 도무지 용서 x 내가 용서를 받아본 일이 없으니.
큰아들이 미쳐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 동생은 아버지 집안에 들어가 있지만 자기는 아직도 집 밖에. 우리는 큰 아들이 모르는 비밀은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애초에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거예요. 차라리 큰 아들도 허랑방탕과 돼지 우리를 거쳤다면, 회개의 눈물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네것이 다 네것 네 동생을 잃었다 얻었기로 즐거워 하기 마땅하다.
방탕한 둘 쨰 아들 만나준 아버지는 불만으로 뒤틀린 맏아들에게도 찾아갑니다. 아버지는 얘, 하고 부드럽게 불렀습니다. 이 아들이 아니고 네 동생이다. 그리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니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니? 아버지의 소유가 다 자식 위한 것이로되 아버지는 그것보다 함꼐 있는 너를 원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거기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가장 맏아들에게 원한 것은 네가 나가 일하는게 아니라 동생 찾아오는 거였다. 배신한 동생이었기에 차마 찾아오라 말은 못하나 날마다 아버지가 나가 기다리는데 그 일을 안하는 것. 저도 여러분이 잘지내고 잃은 양 한 마리 찾아오는 게 가장 기쁜 일예요. 아버지도 동생 찾아 오길 바랐을 텐데 넌 나가 왜 일을 하냐. 이 얘기가 안들리는 거예요 맏아들은. 가만히 하늘 쳐다보고 있음 돈이 나와요? 이런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아들 딸 때문에 고통스러우시단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하염 없이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여주시는 이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불교가 죄인을 다루는 방법 대조 예화.
우리는 탕자 여긴 방자. 한 방자가. 집을 떠나 오랜 세월 허랑방탕 하다가 완전한 거지 꼴 되어 고향으로. 너무나 처절한 고생의 연속이었기에 심지어 아버지의 모습도 분간 못하는 지경. 아버지는 아들 딱 알아봐 종들 시켜 저택 데리고 와 깨끗이 목욕.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아들의 모습 살펴봤어요. 점점 도덕적 사람으로 변해갔어요. 만족한 떄 내가 네 아버지다 밝히고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이거하고 탕자의 비유하고 비교되는 것 알았습니까? 여기선 은혜라는 개념 x 행위로 인한 대표적 가르침. 맏아들이 좋아할 비유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돌아온 탕자 비유 궁극적 주제는 탕자가 아닌 우릴 찾으신 하나님, 인간의 불성실함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있기에 우리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들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밝히셨어요. 회개 전에 하나님이 이미 사랑을 확인하시며 이게 죄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하신 것입니다. 회개 했기 떄문에 받아들인게 아니고 무조건 받아들였어요.
아버지에 대한 오해, 그 결과로 인한 자신에 대한 오해, 또 그 결과로 인한 동생에 대한 오해가 이제 맏아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아버지를 상관으로 생각하는 것. 맏아들의 판단은 아버지의 판단에 동의x 맏아들의 감정은 아버지 감정 공감x 오해의 뿌리에는 은혜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는거죠.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신 거예요. 아버지 은혜 이해 못했던 맏아들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탕자 노릇. 아버지께서는 맏아들도 당신의 넓고도 푸근한 가슴 속으로 돌아오길 바라신다는 것. 맏아들에 대한 것은 우리에게 공이 넘어갔어요. 저는 맏아들 애통. 진짜 중요한 거는 잃어버린 그 한 영혼. 한 드라크마. 이 탕자가 아니라 거기 99무리의 영혼 9드라크마 이 집에 있는 탕자가 진짜 중요하고 유대인 바리새인 서기관 들이라는 거예요. 잘나서 말씀이 안들린다는거예요. 오늘 집에 있는 탕자가 훨씬 힘든 죄인이라는 얘길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돌탕 집탕 모습 다 갖고 있는 목자님 나눔.
이 분은 제가 소개시킨 적이 있는데 학력고사 수석 했다 그랬는데 이번 나눔에 보니까 공부 잘해서 매스컴 탄 적 있었지만 수석은 아니었답니다. 바로잡겠어요. 공부 잘해서 샤프심강도에 나온 적은 있대요. 행정고시 최연소 합격이라고 했는데. 본인은 재경 부처에서만 최연소 합격을 했답니다. 바로잡았어요. 행정고시 전체 수석 아닌 재경부처에서 최연소로 합격. 커밍아웃 하느라고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서울 대학을 갔고 대단한 사람의 나눔이에요.
아버지가 30년 동안 중소기업 해오셨기에 재산 있으신데 아들에게 인색, 어려서 부터 도움x 내가 경제적 어려울 때 감옥 가라 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어릴 적부터 거짓말쟁이라고 엉터리라고 하셨다. 여동생은 편애하셨다. 어릴 적 저는 한글 못 읽고 발표하다 울었다. 초등 저학년 때는 절 특수학교. 컨닝 물건 훔치고 매 맞음. 거짓말쟁이 라고 함. 여동생 서울대, 의사로 장학금도 받았는데. 나도 내가 못한단 생각 안했는데 항상 나보고 엉터리고 운이 좋다고 하였다. 서울대를 가든 고시를 붙든 직장 어떤 일을 하든 엉터리 말을 계속 들으며 살았는데 드디어 이분이 벤처 회사를 차려서 망했어요. 40억 빚 졌습니다. 갚기 위해 지하 라벨 붙이며 스타킹에 나갈 정도로 숙련된 라벨 전문가가 됐어요. 지하에서 십몇년을 붙였어요. 1인 경영이라고 책도 냈습니다. 빚 독촉을 매일 수십 통씩 받으면서 몇 번이나 목을 메려 하였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결혼을 해도 식은땀이 났고. 행정고시 합격했는데도 너는 떨어졌어야 했는데 시험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던 동생이 비행기 추락사로 죽었는데 동생앞에서 아버지는 술에 취해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하나님 믿어도 아버지꼐 인정받고 싶은 피해의식 있으니 아내에게서 아버지의 말투를 볼 때 아내는 피해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내의 눈빛에서 광분을 한다. 지금도 목자인데 피터지게 싸우느라 몇 주전 목장에 못나갔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빚도 갚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이겠다 싶다. 아버지가 힘들게 말씀하시기를 절대 부조 받지 말고 장례 검소하게 하라. 그러나 나는 그동안 부조한 게 얼만데 하는 생각들었다. 이 양반은 내가 어떻게 해도 구원받지 못할 거란 굳센 믿음이 생겨서, 목사님이 사부님을 위해 구원을 위해 망하길 기도했다 하셨는데 나는 그런 기도가 안나오고 온전히 재산이 남아있기만을 기도한다. 지금은 빚이 거의 해결이 됐다. 재산도 증식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감사해야 하는데 나의 능력 벗어나고 열심으로 넘어갓다 생각하는 게 잇다. 근데 아버지가 십 몇년동안 빚 갚는 과정 보시고 너 처럼 운 좋은 놈은 처음봤다 그러셨다. 아버지 생각하면 욱 하고 올라오고 오늘 돌아가셔도, 일년 뒤 돌아가셔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 예수를 믿지 않고 돌아가시면 누구를 만나도 어떤 경우에도 영적 자존감 자신감이 평생에 회복 안될 것 같다.
모든 것 갖춘 이 집사님은 믿지도 않는 부모님과 죽은 동생에 대해 아직도 비교하고 피해의식 있어요. 참으로 돌탕이기도 집탕이기도. 이분 정말 음란과 이런 모든 것으로 돌탕이기도 했는데 여전히 와서 너무 잘나서 집탕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 훌륭하지 않아요? 이분 단칸방에서 십 몇 년을 사는데 그 아버지가 돈 있으면서 안도와줬거든요. 이 아들을 살려냈다고 생각해요. 돈 줬으면 40억을 나랏님이라고 갚았겠습니까? 라벨 붙이며. 할렐루야 놀랠루야. 아버지는 예수도 없이 이러는데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어찌 그렇게 낮아지지를 못하는지. 그러나 그 아버지도 집탕이라 믿긴 하늘의 별따기 인것 같아요. 기도해주세요.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잊고 지내는 중입니까?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중입니까? 아버지께 돌아오는 회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돌탕입니까 집탕입니까? 둘 중에 누구를 고르시겠습니까? 우리가 돌탕이나 집탕이나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집을 돌아오니 그것 밖에 길이 없으니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느낀점
돌아온 탕자를 매일 같이 밭에 나가 기다리시고, 회개 했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벌써 용서하시고 기다리시기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이란 말씀에 위로가 되었다.
평생 아버지와 대척점에 나를 두고 악과 선 이분법으로, 엄마를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두고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술, 담배 안하고 역기능 가정에서 큰 죄 안 짓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까지 들어가니 의로웠다. 특히나 더 영적으로 교만했던 것은 내가 가정 고난으로 말씀 붙잡고 큐티해왔다는 것이었다.
그게 다 무너지는 사건이 올해 찾아왔다. 음란에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드러나는 죄가 있게 되니 죄인과 의인이 있는 게 아니라 죄지을 환경과 죄짓지 않아도 되는 환경만 있을 뿐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집탕인 내가 이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고난과 아픔이 있었다.
아직 여전히 집탕이여서 넘어가지지 않는 부분이 많고 판단 정죄가 죄패인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내가 용납 받은 것처럼 남을 용납할 수 있는 탕자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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